벌거벗은 세계사1322 유비,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벌거벗은 세계사1322 유비,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청왕조의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 일대를 평정한 후 2대 태종 홍타이시 때를 거쳐 3대 세조 순치제에 이르기까지 만주족 전사들은 명왕조와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명왕조를 군사적으로 복속은 시켰지만 한족들의 자존심은 만주족 출신의 청왕조에 봉사할 수 없습니다.는 입장이 완강했다. 그 완강한 민족적 저항의 벽을 뚫고 거대민족 한족의 에너지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원해 내는 믿기지 않는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바로 강희제다. 아울러 그는 아들 옹정제, 손자 건륭제에 이르는 3대 130여 년 간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시발점이었다.

강희제는 타이완과 티베트를 복속시켜 오늘의 중국 지도를 그린 인물입니다. 또 그는 자기 모국어가 아닌 중국어를 자라면서 몸소 익히고 오늘날 강희자전으로 더 잘 보고된 방대한 중국어 사전을 편찬해 냄으로써 오늘의 중국어가 설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강희제 생애
강희제 생애


강희제 생애

대부분의 중국 황제들이 장수하지 못하고 단명한 까닭은 두 가지 상반된 이유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격무 탓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나친 방사 탓입니다. 국정에 충실하려던 황제의 경우 격무에 시달리다. 죽기 일쑤였고 환관과 대신들한테 실질적인 국정을 찬탈당한 황제의 경우 그저 궁안에서 볼모나 마찬가지의 신세에서 방사나 즐기다. 조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강희제는 이 두 가지 함정을 모두 피해 갔다. 그는 환관과 대신들에 둘러 싸인 명목상의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렸지만 문약에 빠지지 않고 광야를 누비던 만주족의 핏줄답게 틈나는 대로 사냥을 즐기며 그것을 견뎌낼 만한 체력을 유지했다. 말년에 가서 다소 몸이 쇠하긴 했지만 그래도 강희제는 강건한 인물이었다. 칭하이에서 돈도브의 군대를 격파하고 티베트로 진격해 그것을 복속시켰던 것이 강희 59년 즉 그의 나이 67세 때였으니 말입니다.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강희제 리더쉽 만한전석
강희제 리더쉽 만한전석

강희제 리더쉽 만한전석

청왕조를 세운 만주족과 그 지배를 받게 된 한족 간에는 먹거리가 사뭇 달랐다. 더구나 청왕조 처음에는 이른바 만주족의 만식 먹거리와 한족의 한식 먹거리 간의 차이만큼이나 만주족과 한족 간의 민족적 갈등과 불화도 적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만주족은 15만여 명에 불과했고, 한족은 그 100배가 넘는 1억 5000여만억5000여만 명이었다. 청왕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족의 참여가 절실했다. 그런 이유로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씻고 민족 간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걱정 끝에 던져진 강희제의 카드는 언뜻 보기에 의외의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상호 이질적인 만주족 먹거리인 만식과 한족의 먹거리인 한식을 한데 모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민족적 화해와 화합을 이루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주족과 한족의 하나의 먹거리들을 모아 올리도록 지시했다.